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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인 정교함과 탐미적 예술 행위를 작업 과정에 반영해 온 중견 설치미술가 김병호가 오랜만에 국내서 개인전을 연다. 최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막한 ‘탐닉의 정원’은 국내 화랑가에서도 모처럼 열리는 조각 전시로 눈길을 끈다. 화려하고 매끈한 질감, 자연스럽게 의도한 먹빛이 상반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물신주의적 사회의 양면적 초상인 걸까. 냉소와 찬미가 공존하는 삶에 질문을 던지는, 김병호의 ‘정원’이다.



국내에 복리이자계산기 선 처음 공개되는 ‘수평 정원’(2018). 황동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500㎏에 달하며, 185개의 ‘정원수’(개별 기둥)를 정교하게 끼워 넣었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없는… ‘김병호의 정원’= 나무, 꽃, 풀, 흙…. ‘정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김병호 작가의 전 차미소 시장에는 없다. 대신, 반들반들한 표면에 얼굴이 비치고, 정교한 짜임새의 금속 모듈이 구성의 미를 뽐낸다. 점, 선, 면이 규칙적으로 직조된 이곳에, 규격화된 형태의 타원구가 가득 모여있다. 이 질서정연한 풍경을 가꾼 주재료는 ‘문명’이다. 즉, 김 작가의 ‘정원’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공해 조성한다’는 개념만을 가져와 새로운 도화지 위에 그려낸 또 다른 안산개인돈 세계다. 정원의 개념을 조형 원리로 삼은 작가는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빈틈없고 매끄러운, 그래서 매혹적인 요소들을 선보인다. 거대한 철판을 구부려 바나나 껍질 같은 형태로 세우거나 눕힌 조형물(정원의 단면), 평평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실은 조금씩 부풀어 오른 9개의 원반(관찰), 57개의 ‘혹’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거나(수직 정원), 185개 ‘혹’ 대영저축은행 이 360도로 빈틈없이 직조(수평 정원)돼 있다.



김병호 작가가 ‘54개의 수직 정원’ 옆에서 전시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박동미 기자


이번 전시는 산업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것, 그리고 아파트처럼 버섯 이미 잘 마감돼 있어 주변에 존재해도 인식하지 못하는 요소들을 끄집어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마치 예술작품도 철저하게 계획된 현대식 설계나 분업 시스템, 그리고 규범과 규칙으로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합의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직선과 평면은 늘 차가운 요소로 여겨지지만, 현대인의 주변에 아주 흔하고 일상적이죠. 그리고 사실 우린 그것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김 작가는 "기간 산업의 제품, 즉 철강과 같은 것들은 결국 인류의 도화지가 아닐까"라고 질문하며 "이를 인간의 기억과 삶의 방식을 섞은 작품으로 드러내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그의 정원은 현대인이 회의하고 부정하면서도 결국 이끌리고 매혹당하고, 탐닉하는 ‘문명의 정원’인 셈이다.
전시는 김 작가가 2018년 해외에서만 선보였던 ‘수평 정원’을 국내 처음 공개하며 신작 14점을 선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문명의 혹’이라 불리는 금속 타원구 조각. 그의 전매특허인 이 조각들은 이번 전시에서도 화려한 빛으로 공간을 눈부시게 만든다. 이 혹은 자꾸 부풀어 올라, 언젠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 ‘욕망의 돌기’ 같다.



김병호 작가의 신작 ‘두 개의 충돌(Two Collisions)’. 두 개의 조형물로 구성된 작품은 하나는 시계 반향으로 다른 하나는 반 시계 반향으로 돌면서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면 결코 만나지 않는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냉소와 찬미… 양가적 시선이 교차하는 ‘탐닉의 정원’= 전시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3개 층(지하 1층, 1층, 3층)을 모두 활용했다. 작품의 주제를 좇아 층을 번갈아 다니면 훨씬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하다. 관람객들은 1층에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은빛 조형물 ‘57개의 수직 정원’에 우선 시선을 뺏길 것이다. 촘촘히 맺힌 57개의 금속은 은빛을 반사하며 동시에 관찰자의 얼굴을 흡수한다. 내가 작품을 보는 것일까. 작품이 나를 보는 것일까. 57개의 ‘나’를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주객전도다. 지하 1층에서 금빛 조형물 ‘수평 정원’을 마주하면, 작가가 추구하는 기하학적 미감이 더욱 가깝게 와 닿는다. 500㎏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형물은 관람객의 눈높이에 떠 있도록 설치됐다. 바닥에는 데칼코마니 같은 선명한 그림자가 만들어져 전시장을 ‘3D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3층에선 작가의 예술 철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평면 및 선의 조형성에 주목한 작품들이 주로 전시됐는데, 4점의 ‘정원의 단면’ 연작은 구부러진 형태에서 서거나 누운 자세다. 무광의 검은색 피막을 입은 조각들은 은빛, 금빛을 뿜는 다른 층과 대비된다. 수평·수직 정원이 현대 문명에 대한 찬미의 시선을 품고 있다면, 정원의 단면은 물질문명에 대한 냉소와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검정의 원판들이 겹겹이 쌓인 구성의 ‘아홉 번의 관찰’은 이른바 평면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른 원판들은 마치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김 작가는 "관찰은 목적을 둔 현대적 행위"라면서 "삶이 결국 관찰의 연속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또, 청동거울(Seeing is Believing)은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 작가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신을 믿기 위해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고, 자신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로 점철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1층 문 앞의 회전형 기계 형태의 작품 ‘두 개의 충돌’로 ‘탐닉’을 끝낼 수 있다. 두 개의 거대한 조형물이 하나는 시계 반향, 또 하나는 반 시계 방향으로 돈다. 하나는 은빛, 하나는 먹빛으로 서로 다른 재료와 질감, 색감을 지니고, 반대로 회전하는 두 조형물은 결코 만나거나 부딪히지 않는다. 작가는 "이게 충돌하면 큰일이다.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라며 웃었다. 그 웃음에 바로 이 전시의 정수가 깃들어 있는 것 아닐까. 예술과 삶에는 냉소와 찬미가 공존할 수밖에 없고, 현대 문명은 좋지만 싫은 것이고, 양평 산속에서 작업하는 김 작가도 전시는 번듯하고 정갈한 도심의 미술관에서 해야만 하니까. 전시는 내년 2월 8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